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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아웃

이 글은 번아웃에 대한 기록이다. 미래의 내가 다시 보라고 쓰는 글이기도 하다. 기록해야겠다는 의지로 노트북을 열었다. 두 달 전부터 여기에 한 발짝씩 발을 담궜다. 그 때는 고작 물웅덩이 정도여서 발을 들면 쉽게 빠져나왔고 이게 뭔가 싶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 어느샌가 허리까지 찼고 이제 점점 움직이기가 힘들어진다. 이게 이 주 전이다. 조금 피곤하지만 해야할 것들은 쌓였고 문제들은 여기저기에 방치돼있다. 정신없이 주위 인풋을 무분별하게 수용하며 나를 더 깊숙히 밀어넣고 정신을 차려보니 목까지 차있다. 이제야 이걸 알아차린다.

무기력증이 극심해진다. 이 주 전만에도 나를 그럭저럭 속이며 침대에서 일어나고 출근할 수 있었지만, 요즘은 무수한 생각들이 나를 사로잡고 다시 눕힌다. ‘나는 왜 이걸 하고 있지’.

익숙한 무대 장치가 와르르 무너지는 경우가 닥친다. 아침에 일어나기, 전차로 출근하기, 사무실이나 공장에서의 네 시간 근무, 식자, 전차, 네 시간 근무, 식사, 잠 그리고 똑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는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이러한 일정은 대부분의 경우 어렵지 않게 이어진다. 어느 날 문득 <왜>라는 의문이 고개를 들고, 놀라움이 동반된 이 무기력 속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 무기력은 기계적인 삶의 행위들 끝에 느껴지는 것이지만, 이것은 동시에 의식도 작동시킨다. … 무기력이란 그 자체로는 뭔가 거북하고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전 주에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이번 주는 도저히 일을 할 수 없는 상태라고 말했다. 과음한 다음 날 술병을 떠올린다거나 음식을 많이 먹어서 더부룩한 상태인데 더 먹으려고 할 때와 같은 느낌이다. 내가 키보드로 타이핑 하는 상상이나 코드를 떠올리면 속이 울렁거린다. 무기력함이 극심하고, 의미 없이 웃는 것도 힘들어지고 주위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도 힘들다. 별 말 아닌 것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공격적으로 받아들인다. 상대방의 모든 행동이 불순한 의도를 품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자책하고 마음이 슬퍼진다. 심할 때는 가만히 앉아있으면 눈물이 날 것 같다.

상태가 이쯤되니 우울증, 번아웃과 같은 것들이 떠오른다. 그런데 문제는 이전에 이런 경험이 없으니 레퍼런스를 할만한 감정 상태가 없다. 몇몇 사람들과 경험 공유를 통해 가장 나와 비슷한 상태에 해당하는 단어를 골랐다. 정확할진 모르겠지만 번아웃이라고 한다.

보통 이런 부정적인 상태가 되기까지 내가 가장 먼저 알아차릴 수 있는 건 감정이다. 슬프다, 불쾌하다, 무기력하다와 같은 감정이다. 이 감정이 왜 생겼는지에 대한 원인은 내 의식이 바로 알지 못한다. 누군가에게 “나 번아웃인 것 같다”라고 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왜?”다. 원인에 대한 질문인데 결국 이것을 알아야 스스로 피드백이 가능하고 누군가로부터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것을 생각하기에는 많은 에너지가 든다. 사실 심할 때는 당분간은 여기에 대해 생각도 하기 싫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냥 나는 지금 무기력한 상태고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에 대한 생각을 스스로 미리 하지 않고 상대방으로부터 “왜?”라고 질문을 들었을 때 피곤해진다. 정확히 이것때문일지 생각해본적 없지만 이것 저것 상대방에게 던지게 된다.

글을 쓰는 지금도 괜찮은 아니다. 전반적으로 마음이 약해진 느낌이다. 내가 이걸 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계속 들고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예전에 잘했던 것들은 그냥 예전에 잘했던 것이고 지금 다시 하라면 다시는 그렇게 하지 못할 것 같다. 아직도 쉽게 스트레스를 받고 예민해지는 것 같다.

늪에 빠지기 전에 존재했던 문제들이 없어진 건 아니니 다시 이걸 어떻게 해결해나갈지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한다. 어떻게 해야 내가 다시 힘이 날지, 동기부여가 될지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한다. 그리고 어떤 것 때문에 내가 이렇게 힘이 빠졌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한다.


(21.11.30 추가)

시간이 지난 지금, 감정적인 부분들은 거의 없어졌다. 이것이 가능했던 건 먼저 충분한 휴식이 있었고, 다음으로 힘들었지만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통해 내 상태가 어떤가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2주간 올해 통틀어 가장 밀도 높게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이전에 이야기했듯이 감정이 먼저 느껴진다. 그리고 안좋은 상태에서 그 원인을 파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기 싫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자연스럽게 그 원인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가장 맞을 것 같은 대답을 내놓는다. 물론 10가지 원인이 있다하면 개중에 말할 수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겠지만 일단 말할 수 있는게 뭐고 없는게 뭔지도 구분이 가능해진다. 입밖으로 내뱉어야할지 아닐지 먼저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러 대화를 통해 조금씩 보정을 거치다보면 가장 맞을 것 같은 원인이 진짜 원인처럼 느껴지고 그것때문에 내가 힘들었구나라고 생각한다. 나를 속이거나 착각하게 만드는 것일 수 있지만 그래도 일단 마음이 편하다.

‘왜 이렇게 힘들었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 팀을 제대로 매니징하고 있나에 대한 부담과 압박감. 잘못된 선택으로 몇달을 날릴 것 같고 모든 화살이 다 나에게 꽂힐 것 같은 불안감. 이런 감정은 이어서 아직 내가 경력이 얼마 안되는데 이런 직책을 제대로 맡아서 성과를 낼 수 있을까에 대한 자책감과 자신감 하락으로 번져간다.
  • 엔지니어로 좀 더 성장하고 싶은데 잘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일까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고,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서 무기력해졌던 것 같다. 하루동안 채용에 대해 고민하고, 보드 관리하고 이거하고 저거하면 어느새 저녁 시간이 된다. 그리고 이제 주어진 스프린트 카드를 그제서야 처리한다. 기술적으로 고민하는 시간이 부족하다. 물론 매니징에 대해서 재미있어 하거나 위와 같은 고민이 없었다면 별 문제 없었겠지만,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불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번아웃”의 2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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